거짓 많은 세상에 양심 바른 사람
페이지 정보
본문
거짓의 근본은 마귀요, 양심의 근본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짓된 마귀와 양심의 사람과 대립을 시킨 것이니 거짓이 있음으로 양심의 사람을 인정하고, 양심의 사람이 있음으로 거짓된 세력을 없애고 양심의 사람만이 사는 시대를 새 시대라 하는 것이다.
이제 ‘어찌하여 세상에는 거짓이 많게 되었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거짓이 세력을 잡게 됨
이것은 거짓된 마귀의 말을 참되신 하나님 말씀보다도 더 따라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 아담 하와가 간교한 뱀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도 더 믿었다는 것이 인생 타락의 시발점이니, 타락한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마귀의 말을 더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공의를 말하고 마귀는 거짓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는 말을 하므로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때그때에 자기에게 만족을 주는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내일 일을 모르는 것이 인간이니 하나님은 사람에게 장래를 행복된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말씀한 것이요, 마귀는 흑암을 넣어주어서 그때에 그날그날 되어지는 일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감화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인간들은 참되신 하나님의 장차 될 일을 말한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인간들의 마음이 어두워진 까닭이다.
2) 거짓된 마귀가 기회 있는 자에게 역사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죄를 지을 때에 참되신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거짓된 마귀가 지배하는 영이 된다. 그러므로 죄의 근본은 정욕이요 정욕의 근본은 마귀가 되는 것이니 인간들이 정욕이란 들보가 마음에 있을 적에 자동적으로 거짓말을 해서 자기들의 유익을 보려는 것이 자동적인 행동이 되는 것이다.
흑암이라는 것은 거짓이요 거짓이라는 것은 마귀의 것이니 누구든지 죄가 있는 자는 자동적으로 거짓된 마귀 감화를 받게 되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거짓을 행하는 자는 양심을 떠난 마귀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거짓을 오히려 자기 도구로 쓰는 것은 그 자체가 마귀의 도구가 된 인격이니 거짓이란 자체는 인간을 망치는 악의 근본이다.
3) 거짓으로 교제하는 세상
사람은 양심적인 교제를 하는 것보다도 일시 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교제는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교제이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믿을 수가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저 사람이 나를 좋게 대한다 해도 이것이 오히려 나를 해치기 위한 일이 되는 것을 미혹이 많은 세상이라는 것이다.
참된 교제라는 것은 조금도 자기의 이문을 위한 것보다도 남을 살려보겠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교제가 아니고는 다 거짓을 가져오는 일이 있게 된다. 도덕적으로 사람이 볼 때에는 옳은 것 같으나 참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볼 때에 바리새교인들이 아무리 남을 구제한다 하여도 주님은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했던 것이다.
거짓 선지가 아무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서 자기의 앞으로 사람을 모은다 해도 이것은 참된 교제가 아니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 야심에서 남을 이용하는 교제가 된다. 사람이 무조건 자기를 좋게 한다고 해서 마음을 두는 일도 속는 일이요, 자기를 일시 괴롭힌다고 해서 원망한다는 것도 어리석은 행동이 될 것이다.
이제 ‘참된 양심의 사람’에 대하여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사람의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도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대하는 양심도 있고 또는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에게 무엇을 얻어보려는 데서 신용을 보이는 양심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 외에는 온전한 것을 소유할 수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에는 조금도 자기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중심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양심에서 아무리 인간이 나를 존경하고 이롭게 한다 해도 진리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것을 끊어버리는 것이 신앙 양심이다. 이 양심으로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찾으신다. 이러한 자에게 초자연적인 신의 세계를 체험하는 데서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된다.
또는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야 앞으로 될 미래의 비밀을 분명히 알게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나타나서 묵시로써 앞으로 될 일을 모두 기록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이 있는 자라야 성경을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교인들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었지만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역사를 반대하는 대적이 되었던 것이다.
2) 양심으로 남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은 언제나 양심으로 남을 사랑하는 자에게 일할 수 있는 것으로 주시는 것이다. 아무리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여도 사명 맡은 불타는 양심에서 남을 살려보려는 행동이 없다면 큰 역사가 일어나지를 않는다.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되 보수적도 있고 진보적도 있는 것이다. 보수적이라는 것은 과거의 것을 지키자는 것이라면, 진보적이라는 것은 그때그때에 아무런 난관이 부딪쳐도 그 시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역사를 일으켜야 된다는 것을 목적하고 싸우는 사명자의 양심이다. 아무리 바리새인들이 보수를 지켰지만 남을 살린다는 양심의 불이 없는 자이다. 에베소 교회가 보수적인 사상을 가졌지만 사랑의 불이 꺼졌던 것이다.
우리는 남을 살린다는 양심에서 불이 붙는 것이 있어야 새로운 열매가 나타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지금 아무리 거짓된 세상에서라도 이 시대를 바로 알고 환난과 재앙 속에서 남을 살려보려는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나서는 자라야 권리 행사의 새로운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정한 일이 있다 하여도 불타는 사랑, 양심적인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런 역사를 할 수가 없으므로 언제나 악한 사회에도 사랑의 불이 붙는 자를 들어서 그 시대 사람을 깨우치고 새로운 변천을 가져왔던 것이다. 아무리 붉은 용의 앞잡이 거짓 선지의 미혹이 세계를 덮는다 하여도 참된 사랑의 양심에서 순교자의 뒤를 따르는 자를 통하여 촛대 교회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한 새로운 단체를 이루게 될 것이다.
- 이전글숨은 종의 기도
- 다음글불가피한 환난에 대하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