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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아들의 영화와 아버지의 영화 - 요1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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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라는 것은 아들의 영화와 아버지의 영화가 무엇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기독 신자가 덮어놓고 영화를 바라본다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영화와 성부의 영화를 바로 아는 데서 우리는 영화롭게 될 수 있다.



  1. 성자의 영화 (1~2)


(요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 영화롭게 된 일은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에 온 일이다.


  성자께서 영원히 성자의 신으로 있다는 것은 영화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아담을 낼 때에 아담 자신이 영화롭게 될 인격을 준 것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은 아들의 이름으로만이 영화롭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 나신 일이 창조의 목적을 달성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인 것이다.

  흙에서 난 몸이 흙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 영화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소원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로 거룩한 물과 피가 마리아에게 임하여 그 몸이 인간에 탄생되었다는 것은 성자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완전한 몸이 없이는 영화라는 것이 다 풀의 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신이 완전한 몸을 하나님께로 받았다는 것은 큰 영화를 가져올 싹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 : 그 몸이 대속의 제물이 된 일이다.


  아무리 성자가 완전한 몸을 성령의 잉태로 받았다 하여도 그 몸을 가지고 홀로 있다는 것은 영화가 될 수 없고 그 몸이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만이 천하 만민이 예수님의 몸과 같은 몸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큰 열매가 되는 것이니 영화가 되는 것이다.


  셋째 : 통치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통치하려 해도 죄진 사람을 그냥 두고 통치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그 아들에게 맡긴 것이 만민에게 영생을 주는 일이 되므로 영화롭게 된 것이다.



  2. 성부의 영화 (3~7)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17: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조물주 하나님은 영화를 목적 두고 창조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신은 자기 홀로 있어서 아무런 영화가 없으므로 대자연을 창조하시고 자연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보다도 그것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을 통하여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물이 된 사람은 자기 힘으로 도저히 자연을 바로 사용하는 인격을 갖지 못하므로 오히려 자연계를 지배하는 것보다도 자연계의 지배를 받고 오히려 그 물질 앞에 종이 된 인생이라는 것은 조물주를 영화롭게 못 하고 노엽게 하는 일이 된다.

  이제 성부의 영화는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행하는 자가 있으므로 (3~4)


  이 땅에서 하나님이 하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없게 될 때에 이 세상은 죄의 세상, 사망의 구렁텅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의 하라는 일을 다 하였던들 그야말로 얼마나 큰 영화가 될 것인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고 말씀한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없다면 하나님께는 아무런 영화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그 영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보다는 하나님의 큰 슬픔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시는 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아버지의 앞에 예배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은 큰 영화가 되는 일이다.

  첫째 아담이 순종치 않으므로 천하의 모든 사람이 질적 타락으로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엡2:3).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신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주고 싶은 사랑의 자체가 되신 하나님의 영화가 되는 것이다.

  의 중에 큰 의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을 순종하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스도 한 분이 하라는 일을 하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이다.


  둘째 : 아들과 함께 영화롭게 됨 (5)


  예를 든다면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 아버지 마음이 슬퍼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은 아들과 함께 영화롭게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아들이 영화롭게 될 때에 아버지는 그것을 자기 영화로 생각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는 것이다(요14:13~14).

  인간이 행하므로 되는 것보다도 아들의 이름으로 응답이 와서 이루어지는 일을 하나님은 영광스럽게 아는 것을 우리 인생은 알고 겸손히 그 뜻에 순종하는 것뿐이다.

  


  결  론


  영화라는 것은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고 성부, 성자의 영화 아래서 우리는 같이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 우리의 영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의 활동은 죄를 지은 인생들이 성부, 성자의 영화 아래 들어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6~7).



71년 6월호 <설교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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